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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팜 파탈의 재림

※ 12월 5일 [디아티스트매거진]에 개제한 칼럼입니다.


ⓒSM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

전통적인 걸 그룹의 포맷으로만 레드벨벳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많은 걸 그룹이 귀엽고 순수하거나 성숙하고 섹시한 컨셉 두 선택지 사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고, 레드벨벳 역시 데뷔 당시부터 ‘강렬하고 매혹적인 레드와 클래식하고 부드러운 벨벳’ 두 가지 컨셉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곡인 ‘행복(Happiness)’과 ‘Be Natural’의 장르적, 비주얼적 차이를 생각한다면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키치하고 감각적인 작업물을 만들어온 SM 소속의 그룹인 만큼 여느 그룹들 보다는 훨씬 독창적인 이미지의 모습들을 보여오기는 했지만 걸 그룹의 전통적인 포맷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었다. 지금까지는.

'피카부(Peek-A-Boo)' 뮤직 비디오 중. ⓒ SM TOWN 공식 유튜브 채널
'피카부(Peek-A-Boo)' 뮤직 비디오 중. ⓒ SM TOWN 공식 유튜브 채널

벨벳 컨셉의 타이틀 곡 ‘피카부(Peek-A-Boo)’는 얼핏 이건 레드 컨셉의 곡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빠른 템포의 곡이고, 여느 많은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가사와 비디오를 자세히 본다면 피카부가 그리는 세계는 그 속을 관찰하는 우리들, 혹은 뮤직 비디오 속 피자 배달부에게는 그리 재미있기만 한 곳은 아니다. 표면에 사랑과 연애를 내세웠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꿈꾸는 소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사랑은 새 것 같이 반짝거리고 설렐 때만 사랑이고, 상대는 자신의 놀이에 낀 것일 뿐이며, 이 놀이는 정글짐이 달에 걸릴 시간 까지만 이라고 자신들의 사랑을 규정한다. 뮤직 비디오 안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멤버들은 남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지루해 보이는 일상을 보내다가 우연히 찾아온 피자 배달부과 얼핏 즐거워 보이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정이 지나자 석궁과 무기를 들고 그를 쫓아내려는 것인지 추격하려는 것인지 마치 고전 B급 슬래셔 무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를 연상시키는 태도로 따라온다. 비디오 속 남자는 집 밖에서 창문을 통해 본 처음 본 이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하며 집 밖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저택의 밖에도 그들은 존재한다. 당연하다. 이 노래는 그들은 실존하는 여성들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SM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

‘피카부’는 낭만화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곡이다. 흔히 사람들이 ‘여성은 이런 사랑과 연애를 꿈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낭만화된 사랑 말이다. 걸 그룹들은 전통적으로 이런 사랑을 이야기해왔고, 오직 남자가 그들을 속이거나 배신했을 경우에나 짧은 단발을 하고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후 욕과 저주를 하는 정도의 예외가 허용되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새 것 같이 설레는 사랑이 지나간 후의 지루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그만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불명확하고 모호하고 가변적인 태도를 여성에게는 허용하지 않았고, 여성의 입에서 그 사실을 듣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금지해왔다. 비록 현실에서는 이러한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인정해왔을지 몰라도, 미디어에서는 오랫동안 이러한 여성들을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 파탈’로 규정했고 그들은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을 것이라며 미디어를 소비하는 남성들을 안심시켰다. ‘피카부’에 그런 해피엔딩은 없다. 가벼운 플럭 신스 사운드는 곡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대신 불길한 긴장감을 지속시키고, 뮤직 비디오는 남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니폼을 비추며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왔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마치 사이코 슬레셔 영화의 결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애매하게 닮은 것에서 가장 큰 불쾌감과 불안함을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불쾌한 골짜기’ 이론이다. 선미가 ‘가시나’를 통해 모호하고 불명확한 태도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 것처럼, 레드벨벳 역시 예측할 수 없는 표정과 행동들로 ‘피카부’를 을씨년스럽고 불길하게 연출했다. 그들은 여전히 예전부터 많은 여성 아이돌들이 그래왔듯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곡과 뮤직 비디오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한 종류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예측하기 어렵고, 파악하기 힘든 팜 파탈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들이 그들을 향한 공포로부터 안심하도록 팜 파탈들이 스스로 파멸하는 ‘해피엔딩’은 더 이상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디아티스트매거진]에서 아이돌 이야기를 합니다. 트위터 계정 : @loveless0315 @2nd_Li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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